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문단 편집) ==== [[최후의 심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anvasreplicas.com/Last%20Judgment.jpg|width=100%]]}}} || ||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 시스티나 천장화뿐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역시 굉장한 작품. 미켈란젤로의 여러 작품이 그렇듯 이것도 내막을 알면 알수록 복잡한 심경이 들 수 있는 작품이다. 소빙하기 기간 혼란에 빠진 유럽은 끝내 가톨릭에 대한 실망감에 종교 개혁의 돌풍으로 빠져들어갔고, 그런 혼란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여러모로 복잡한 배경들이 깔려있다. 이 작품은 [[클레멘스 7세]]가 1535년 미켈란젤로에게 이 작품을 의뢰한 것으로, 그 배경에 [[신성 로마 제국|로마]]의 황제 [[카를 5세]]가[* 정확히는 그가 고용한 란츠크네흐트 용병대. 용병대도 원래 로마까지 처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황제가 급료를 불성실하게 주기 전 까지는.] [[로마]]로 쳐들어와 [[사코 디 로마|로마를 약탈한 역대급 참사]]가 있다. "명색이 가톨릭 신도이며 로마인이라는 작자가 '로마 황제' 주도로 로마를 박살낸" 참상에 엄청난 분노를 느낀 클레멘스 7세는 '''"참 의인은 거둬들여지고 거짓된 자는 내쫓겨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란 의미로 이 작품을 기획해 의뢰하였다. 로마를 개발살 낸 것에 대한 분노는 의뢰를 수락한 미켈란젤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의뢰 의도에 아주 걸맞는 그야말로 분노가 가득한 불후의 걸작을 탄생시켜냈다. 상당한 규모의 기획이었던지라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심판을 받으러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1535년 9월 1일, 그를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하며 예우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보다도 이쪽을 더 걸작으로 치는 사람들도 많을 만큼 대단한 작품이지만... 사실, 이 작품은 성전에 그려 넣기에는 은혜로움이라고는 1도 찾을 수 없는 그림이다. 당장 중앙의 예수 부터가 성화에 그려지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예수란 걸 알아보기 힘들다 못해 아폴론을 그린 것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이것은 잠들어 있다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면 내쫓기고 잔치 주인이 너흴 알아보지 않을 것이라 한 것에서 따온 듯하다. 즉, 최후의 때에도 회개하지 못한, 진정으로 선하지 못한 자는, 그때에 예수가 전혀 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외면할 것이라는 것이라는 강경한 표현이다.], 그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말 속에서 간신히 건져올려지는 의로운 성도들이, 좌측에는 '''예수에게 가차없이 내쫓겨나는 가짜 의인들'''[*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등의 잔혹한 묘사까지 잔뜩 있다.]이 그려져있다. 게다가 우하단을 보면 그렇게 내쫓긴 거짓 증인들을 악마들이 가차 없이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으며 심판을 선포하는 천사들도 이들을 혐오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실 현대에 남아 있는 그림은 일종의 '수정본'으로, 원래는 쫓겨나든 거두어들여지든,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이는 종말 앞에서 한낱 인생은 그저 하느님께 구해달라고 갈구해야만 할 뿐인 미천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며, '''그런 주제에 로마를 약탈한 니들은 지옥에 떨어져라!'''란 분노의 표현이다. 이러다보니 당대에도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하지만, [[바오로 3세]]는 적당히 이 작품을 두둔했고, 끝내 성직자들도 탄원을 그만뒀다. 다만,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나체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분명 성도 로마의 가장 성스런 장소에 두기에 좀 뭣한 그림이기도하고, 애초 후원자가 교황청이었기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혹평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었는데, 소소한 복수(?)로 6년 반에 걸친 이 그림 제작 과정에서 '''4구역의 오른쪽 하단에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복수의 의미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표현된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을 직접 그려놓았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하다. 즉, 무뇌하단 상징이고,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사실상 성직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날려버린 셈.) 이런 미켈란젤로의 장난질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추기경은 교황인 [[바오로 3세]]에게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탄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혹여 자기도 천사에서 악마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옥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라며 묵살해버렸다. 낙성식은 1541년 10월 31일. 일설에는 낙성식 당일 벽화를 본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 '''"[[야훼|하느님]], [[Dies irae|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바오로 3세]] 선종 후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율리오_3세|율리오 3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마르첼로_2세|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 이 성화에 대해 별 조치가 없었으나, [[비오 4세]] 이후,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하며, 기존 가톨릭 내에 잔재로 남은 '부적절한 풍습'을 상당부분 정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천지창조도 덩달아 철거될 뻔 했다.[* 종교 개혁으로 뚜들겨 맞은 가톨릭 전체가 반성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는 바였기 때문에 로마와 연락이 거의 안 되는 외딴 곳의 성당들도 너도나도 나서서 로마 전례서를 따라 교회 일치에 나섰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로마 전례를 재정립한 로마 전례서를 출판하는데 1등 공신이 된것은, 바로 성경 번역본을 찍어내어 종교 개혁의 1등 공신이된 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였다. 정보혁명을 일으킨 인쇄기가 어느 방향으로든 개혁의 선두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 앞에서 인생은 구원을 구걸하는 미천한 존재란 것을 강조한 의도 만큼은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 작품을 성화로 인정하기는 하되, 대신 재정립된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이 일로 인해 볼테라는 후대에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놀림을 당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